그러니까 이 시종은 네 자릿수가 넘는 시간을 살아오면서 너무도 무뎌진 탓에 최근 이삼백 년은 연애고 사랑이고 하는 인간적인 감정과는 담 쌓고 살았을 것이다. 배척받는 인외 종족의 혼혈인지라 항상 자신을 숨기고 살아야 했던 것은 당연지사, 그 오래 전 아버지가 인간의 수명을 다해 죽고 어머니가 다크엘프의 수명을 다해 죽으니 스러질 생명을 사랑하는 건 꽤 오래 전에 관뒀을 거다.
어떤 크기의 사랑을 퍼부어주더라도 이별과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고 사랑하는 이가 떠나고 남겨지면 그 비참함과 꺼진 생명에 대한 회의감은 이루 말할 수 없으니까. 모종의 이유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더라도 항상 대외적으로 내세우는 가짜 신분에 언제나 이건 한순간의 유흥으로 대했을 것이다, 아마도.
그도 그럴 것이 그의 반쪽은 다크엘프의 피가 흐르고, 벌써 네 자릿수의 인생을 살아왔으며 가문은 멸문하기 직전이라 하더라도 한 왕국의 개국공신 가문. 그래. 꽤 유서 깊은 가문의 홀로 남은 가주가 실은 천 년째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며 후계를 이을 생각은 없고,백 년에도 두세 번씩 자신의 외양을 조금씩 바꾸어 가주 자리를 물려받는 것처럼 꾸미고 이름까지 갈아치운다는 게 알려지면… 왕국 전체에 크나큰 파장이 올 테니.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세자를 전에 없이 진심으로 귀애하게 되었다. 다크엘프 하프인 것을 숨길 필요도 없으니당장은 아니더라도 조금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진짜 신분을 내보여줬으면. 자신을 보호해주는 모든 패를 내려놓고 진실만을 고하기를.
자신이 쥔 패를 내려놓겠다는 건 이제 내 목숨과 앞길은 네게 달려있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으니.